CSR, ESG / / 2024. 11. 9. 10:13

파타고니아스쿨(11) 미실란과 생명다양성

'세계를 바꿔야 한다'고 마르크스는 말했다.
'삶을 바꿔야 한다'고 랭보는 말했다. 
이 두 구호는 우리에게 하나다.  
- 앙드레 브르통 - 

 
  일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해왔지만, 좀 더 솔직하게는 쉬거나 노는 걸 불안해하는 편이다. ESG 조직에 와서는 그게 더 심해졌는데 내 일에 대해서 온전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 같아서다. 회사 PR에 기여할 수있는 딱 그 정도 일. '좋은 일하네~' 소리 듣는 수준의 일. 그러니까 그 누구도 위협하지 않는 일. 기실 외부의 시선이라기 보다는 나 스스로도 그걸 알았던 것 같다. 오기같은 게 생겼고 일을 중심으로 하루를 가득 채워나갔다. 그러다 같이 일하던 후배가 병가를 냈고 결국 조직을 떠났다. 이때 뭔가 잘못된 걸 알았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 싶어서 상담 대학원을 갔고 PUBS에도 참여했다.

  내가 곡성과 미실란에 가서 본 건 뭘까. 한가지 확실한 건 미실란과 생명다양성이란 키워드는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주장하기 보다는 주장하는 대로 살고 있는 모습이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미실란의 비즈니스 구조 보다 중요한 게 미실란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사는지다. 젊은 혈기에 미실란에 왔다가 한계를 느끼고 떠난 청년도 있고 생의 전환점에서 미실란을 택하고 굵직한 기여를 이어가고 있는 청년도 있다. 70대도 '아이' 소리를 듣는다는 곡성에서, 그 모두를 품는 넉넉함을 만들어 낸 미실란은 특별하다. 결국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그 공동체가 어떤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가가 공동체의 생명력을 좌우할 것이다. 

1.  건강을 이야기하는 대표님 

  대표님이 직접 미실란의 역사를 소개하는 세션이 있었는데, 기억에 남는 대목은 이후의 Q&A 시간이었다. 오직 건강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셨다. 균형잡힌 장내 미생물 구성이 중요하다는 전제에서, 채식만 해서도 안되고 단백질만 먹어서도 안되는 이유를 설명해주셨다. 기업 대표가 아니라 미생물학자의 모습이었다. 장수 마을의 공통점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는 절로 토란 미숫가루가 사고 싶어졌다. 어머니의 암투병을 위해서, 자녀의 아토피 치료를 위해 노력한 이야기와 어우러져서 미실란 제품이 단순한 돈벌이가 아님이 명확해진다. 미실란을 어떻게 재무적으로 성장시킬 건지, 기업 경영의 애로사항 등을 이야기 할 틈이 없었는데, 그만큼 무엇이 더 중요한지가 명확했던 것이다. 

  파타고니아 스쿨 동료기도 한 기미경 팀장님은 힘든 시절에 미실란에 와서 농사일을 거들었다고 한다. 힘든 때 갈 만한 곳이 미실란 뿐이었을까? 미실란을 떠올랐던 건, 미실란의 특별함을 봤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떠나는 우리 일행을 보면서도 대표님은 힘들 때 언제든 찾아 오라는 말씀을 하셨다. '미실란이 상담소도 아닌데?' 하면서도 그 말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속도나 방향이 모두 버겁게 느껴질 때, 들릴 수 있는 곳이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 때문인 것 같다(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볼 지점이 있다. 왜 지금 바로가 아니라 힘들 때일까? 서울을 떠난 삶이 나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뒤쳐짐이라면 무엇으로부터 뒤쳐진다는건가?). 생물다양성과 미실란이 맞닿아있다는 것을 일별한 순간이었다.  

※ 대표님이 말씀하신 장내 미생물의 균형과 관련된 연구 결과를 찾아봤다. 정서와 회복탄력성도 장내 미생물과 관련된다는 연구가 있다. 

- 스트레스에 대한 회복력이 높은 사람들은 회복력이 낮은 사람들과 다른 장내 미생물 구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의 장내 미생물은 염증을 줄이고 장 장벽 기능을 개선하는 활동과 연관된다.                  
https://www.npr.org/sections/shots-health-news/2024/06/24/nx-s1-5018044/gut-microbiome-microbes-mental-health-stress

- 장 뇌(gut brain)는 우리 뇌보다 신경전달물질을 많이 생성하는데,
 체내 세로토닌의 95%가 장내 미생물에 의해 생성된다. 
https://news.harvard.edu/gazette/story/2023/04/expanding-our-understanding-of-the-gut-feeling/

미실란의 역사를 직접 소개 중이신 이동현 대표님. 후배의 꼬임에 넘어가서 630종의 품종 연구를 하게 된 일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농촌진흥청에서 37년(1980년~2017년) 간 약 350개의 벼 품종을 개발<sup>1)</sup>해왔다니, 그 규모를 가늠할 수 있겠다. 이는 사람이 많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그 일의 중요성에 공감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다. 스타트업이 대기업을 이길 수 있는 이유.
발아 현미와 그냥 현미의 차이가 얼마나 큰 지를 처음으로 알았다. 장내 유용미생물이 강렬하게 반응하는 건 현미가 아니라 발아 현미이다. 장내 미생물의 균형을 신경 쓴다면 발아 현미를 먹는 게 좋다.

2. 마을 공동체와 함께하는 미실란 

  쌀을 파는 회사에서 왜 영화제를 하고 책방을 운영할까.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선택과 집중을 해야할텐데, 거기에 영화제와 책방이 포함되어 있다. 이게 미실란의 기업문화라는 건데, 최근 인터뷰를 보면 대표님의 답이 실려있다. 

-김탁환 작가와 함께 생태 책방 ‘들녘의 마음’을 열었는데.
“교사들을 만났더니 ‘곡성이 책방 소멸 지역이라 매 학기 아이들과 광주·순천으로 책방 견학을 간다’고 해요. 책방이 필요하다고 해서 열었습니다.”

-섬진강마을영화제는 왜 하시나요.
“책을 읽지 않는 60대 이상 지역 분들이 참가할 수 있는 행사가 필요하겠더라고요. 마을 전체를 아우르는 영화제 같은 걸 하면 좋을 것 같았어요. 작은들판음악회와 그림·사진전, 북토크도 엽니다.” 

-농사만 짓기도 힘들지 않나요?
“농촌이 지속 가능하지 않은 이유는 재미가 없어서거든요. 재미는 뭘까, 생각해보니 문화더라고요. 농업과 문화에 접합점이 있을 때 청년들이 관심을 기울입니다. 소비자들도 미실란과 우리가 만드는 발아현미에 대해 긍정적 이미지를 갖고요.” 2) 

  훨씬 멋있고 비장하게 말할 수 있는 대목을 이렇게 짧게 답하다니. 해야하니까 한다는 식이다. 알려야 한다 생각해서 미실란을 알리고 있는 김탁환 작가님과 닮아 보인다. 재미를 위해서라고 했지만 결과적으론 공동체가 확장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일례로 책방에는 아이들을 위한 책도 많았다. 실제로 학생들을 위한 생태교육도 하고 있다. 단순히 재미있어 할 걸 제공하는 게 아니라, 재미를 만들어 내고 있다. 나는 이와 유사한 조직을 진주에서 본 적이 있다. 진주문고는 단순히 서점이 아니라 진주 지역에 문화적 다양성을 만들어 냄과 동시에 시민들이 모이는 구심체 역할을 한다. 술자리, 노래방에 끌려다니는 게 힘겨웠던 사회초년생 시절을 그나마 견딜 수 있게 해준 공간이었다(나중에 김장하 선생님이 진주문고를 지원했다는 걸 알고는 그 분과 연결고리를 찾아서 기뻤다). 

미실란 곳곳을 소개하는 혁신사업팀 기미경 팀장. 미실란과 곡성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컸는데, 주변 사람에게 영향을 줄 만 했다.

  『디컨슈머』를 읽으면서 '에노키앙'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미실란을 떠올렸다. 2세기 넘게 이어진 가족 기업에 적용되는 '에노키앙'은, 지구상에서 365년을 살았던 에녹이라는 성경 속 인물에서 따온 말이라고 한다.3)   오랫동안 장수하는 기업이 가족 기업인데에는 함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단기의 이익을 쫓지 않고, 내 주변 사람들을 잘 살리기 위해서 기업을 운영할 확률이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실란 대표님의 가족들이 다들 회사일이나 농업과 관련된 일을 한다는 게 중요한 장면이라 생각한다. 젊은 사람들이 곡성까지 찾아오게 하는 힘은 이익을 쫓지 않으면서 생명다양성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가능한 모습이다.

  곡성에 가서 나는 동료들에게 '생물다양성' 개념에 공감이 가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겨울에 눈내리는 얘기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나에 대해서 더 깊게  마주하고 싶은 마음에서 한 말이었다. 그런 와중에 진석님의 말씀이 선명하다. "발표 자료에 멋진 그림을 넣은 것도 좋았지만, 주변의 자연을 한번 보는 것도 좋겠다"는 말이었다. 시간이 좀 지난 지금에 와서 그때를 떠올려 보니, 생물 다양성을 공감하지 못한다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건, 다양성을 폭넓게 품어주고 있는 사람들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을 때, 좀 더 나다워 질 수 있다.

  은둔고립 청년 지원 사업을 할 때나, 지금 발달장애 사업을 하면서 반복적으로 마주하는, 그러나 회피하고 싶은 진실이 있다. 이것만으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이디어톤으로 서비스 기획을 할 수 있는 은둔 청년이 몇 이나 되겠나. Vision AI로 감지 하지 못하는 수 많은 도전행동(Ex. 화장실 문제, 침뱉기, 운전 중 돌발행동 등)을 하는 발달장애인에게 우리 사업은 또 어떤 의미이겠나. 결국 우리 사회가 포용성을 넓혀 나가는 것이 큰 틀에서 가야할 길이고, 그 길에  '생물다양성'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 길을 제대로 걸으려면, 쫓기듯 살고 있는 내 삶을 우선 돌아볼 일이다. 우선은 미실란 쌀로 밥을 해먹는 것부터 시작해보려 한다. 

2024년 10월 6일 강빛마을

 
1) 「기후변화에 따른 국내 벼 품종과 재배기술의 적응성에 관한 고찰」, 한국작물학회지, 2020년   https://koreascience.or.kr/article/JAKO202034965719354.page
2) "벼농사도 자식 농사도 기다릴 줄 알아야… 들녘이 내 스승", 조선일보, 2024년 10월 12일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4/10/12/B4S3PB6EWZGJFL4S5EXDJB4WMM/
3) 『디컨슈머』, J. B. 매키넌, 문학동네
 

  • 네이버 블로그 공유
  • 네이버 밴드 공유
  • 페이스북 공유
  • 카카오스토리 공유